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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시선의 높이가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by 북스메리 2022. 3. 25.

 

책 표지

책 추천/탁월한 사유의 시선

어떤 시도도 실패로만 마무리되는 법은 없다. 그 시도 자체가 이미 성공을 부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실패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동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경험된 동력은 실패의 암울한 풍경 속에서도 꿈꾸는 자들을 더 심층적이고 새로운 곳으로 인도한다. 문제는 꿈을 꾸지 않는 일이다. 시도하지 않는 일이다.

어쨌든 부국강병의 가장 근저에 문화가 있다는 것, 사상이 있다는 것, 철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학의 생산은 곧 사유의 독립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자신들 논의의 뿌리를 윤리사상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윤리사상은 단순히 좁은 의미의 '윤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문화, 철학, 사상을 다 함께 말한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것, 즉 사상과 문화와 철학에 꽂힌 것이다.

내 것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내게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효율적이고 핵심적인 방법이다.

철학이 국가 발전의 기초다.

아마 '전략적인 높이에서 하는 사고' 정도가 될 것이다. 전략적 단계는 전술적 단계를 지배한다.

더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며 독립적이고 주도적이다. 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짜진 판 안에서 사는 전술적인 사고와 달리,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다. 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판을 새로 짜는 일이 대한 사고가 바로 전략적이다.

이 숙명의 벽을 넘으려면 시선의 높이를 상승시키는 길밖에 없다.

스스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결정하지 못하는 한 종속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며, 삶의 높이가 바로 사회나 국가의 높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서기가 그렇게 어렵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기존의 시선을 교체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아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일본이 나아가려고 하는 방향을 판단하고 그 판단 아래에서 우리의 대응 방안을 고민하는 것, 동아시아나 세계정세 속에서 아베 행위의 위치를 점검하고 대응하는 것, 이것들이 중요하다. 아베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욕하고 성토하는 것 말고, 이제는 더 높은 차원의 전략적인 판단과 실질적인 대응을 하는 일이 필요하다.

철학적 시선이라는 것, 그것은 인간이 지성적인 차원에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시선이다.

그들이 남긴 철학적인 내용을 숙지하는 것은 철학적인 활동이 아직 아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앞선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 즉 사유의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시선의 높이에 동참하는 능력을 배양해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우리가 아는 큰 철학자들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닮기 위해서 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시선으로 자기처럼만 산 사람들이다. 노자도 공자도 칸트도 헤겔도 모두 '자기처럼' 산 사람들 뿐인다.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세계에 철학적으로 접근한 사람들이다.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어려운 기술을 익히고 이를 자랑하는 것에서도 큰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린이들에게 놀이는 스스로 낯선 세계에 참여해 자신을 확인하거나 확장하는 한 방식이다.

철학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탁월한 높이의 시선을 갖는 것이라고 할 때, '자기 파괴' '자기부정'의 과정은 그야말로 필수 적이다. 사실상 철학은 아주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고도의 지적 활동이다. 타고나지 않는 한, 훈련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숫자를 다룰 수 있는 사람과 다루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도 큰 차이가 난다. 이렇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양한 특정 경우를 숫자 하나로 지칭하는 일은 매우 경제적이다. 경제적이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에 힘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을 활용할 줄 알면,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커진다.

문제는 우리가 철학적인 지식에 익숙해지는 단계를 넘어서서 스스로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지성이 한 발짝 한 발짝 상승해서 더 이상 오르지 않아도 되는 그곳, 거기에 철학이 살고 있다.

판 자체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새판 짜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존의 판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지식의 축적 여부를 떠나 지성적인 높이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가 그 사람의 격을 결정한다. 그 지성의 극처에 철학이 있다. 창의적이고 독립적이 선도적인 일들은 모두 판을 새롭게 짜는 결과를 낳는다.

당연히 선진국은 전략적인 높이에서 활동하는 국가다. 생각의 수입은 삶의 기본원칙들을 수입한다는 것으로 결국 종속성을 드러낸다. 독립적일 수가 없다.

만들어진 이론을 진리로 착각한다. 현실적인 세계가 아니라 수입된 이론을 진리로 간주하기 때문에 시선은 온통 그 이론 체계에만 집중된다. 철학 생산자들은 모두 시대와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우선 자신을 지성적으로 튼튼하게 하는 일이다. 모든 철학적 자산은 독립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철학을 통해 자신이 튼튼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은 '높은 시선'이다. 높은 차원의 활동성이다.

하지만 아무리 철학적인 지식이 많아도 '철학'을 하지 못하면 아무 의가 없다. 철학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활동'이다.

그래서 종국에는 윤리, 철학, 사상이 세계를 해석하고 세계에 참여하는 가장 높은 방법이라 여기고 이를 자신들의 세계에 적용하려 분투하였다.

문화나 철학, 예술은 현실과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것들은 모두 현실 너머에 있는 어떤 것, 현실이 충족되고 나면 향유하는 것, 고상하지만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문화와 철학과 예술이 곧 현실이라는 인식이 강하지 않다.

이 독립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의 주요 자양분이 바로 철학적 시선이다. 질문은 '우리'로부터 이탈한 독립적 주체들만이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사실 질문이 성한 나라가 선진국이다.

반면에 자기 독립적 주체성보다는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가치에 자기 자신을 더 의탁하면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는 길이 막힌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민의식이 약할 수밖에 없다.

선진국 수준의 삶을 만드는 선도력을 갖기 위해서는 '장르'를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장르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질문'의 힘을 내면화하는 시민의식이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패턴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계속 꿈꿔보는 일, 이것이 '상상'이다.

어떤 것이 발산하는 높이와 보는 사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으면 거기서 재미가 생길 수 없다.

그곳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트다'라는 말을 들을 수 이 쓰려면 그것은 유일하고 고유하며 가장 탁월한 단계, 가장 높은 단계로 상승해 있어야 한다.

'이론'에 갇히면, 사유의 대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려는 용기가 약해진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의 수준은  사실 그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가진 생각의 높이일 뿐이다. 생각의 높이가 시선의 높이를 결정하고, 시선의 높이가 활동의 높이를 결정하며, 활동의 높이가 삶의 수준을 결정한다. 결국 생각의 높이가 세계의 수준을 결정한다.

'따라 하기'로는 효율성을 더 이상 높일 수 없고, 그만큼 이익 창출이 어려워졌다.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질문은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만 할 수 있다.

지적으로 부지런하면, 정해진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현상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향해 계속 돌파해 들어간다.

훈고의 기풍을 벗어나 창의의 기풍을 세운다는 것은 이렇듯 지적인 게으름을 벗어나 지적인 부지런함을 회복한다는 이다. 문제는 관찰, 통찰, 사유의 집요함 같은 부지런함이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격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나와 사회를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기풍으로 채우는 일은 결국 나와 사회를 인격적으로 성숙시키고 준비 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식의 습득보다 인격적 성숙은 난이도가 훨씬 높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가는 난이도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리는 것도 선진국으로 올라서도록 해주는 대부분의 조건이 인격적 차원의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지적인 통찰을 발휘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건립하거나 창의적인 관점을 제기하는 일 등은 모두 그럴만한 인격이 갖추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같은 교육을 받고, 비슷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은 그냥 평범한 학자로 남고, 어떤 사람은 인류에게 빛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등극한다.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어서 이렇게 달라지는가?

결국은 '사람'의 차이다. 인격의 차이다. 인류에게 빛을 보여주는 참된 지식의 생산은 그럴만한 인격적 함량을 가진 바로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모든 일들이 다 그 일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의 크기와 깊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우리는 각자의 가치관들로 채워져 있는 가치의 결탁 물이다. 자기 살해를 거친 다음에야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등장한다. 자기살해 이후 등장한 새로운 '나', 이런 참된 자아를 독립적 주체라 한다.

기존 관념에 맞는지의 여부만 따져서 하는 일은 매우 편하고 쉽고 안전하다.

사회나 집단과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발성이 그렇게 크지 않다. 사회와의 조화를 먼저 강조하는 사람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력이 강하지 않다.

참된 사람은 폐쇄적으로 자신을 지배하던 믿음 체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개방적이다.

개방적 자아는 사회와 충돌을 빚을 것처럼 보이지만,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과 함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오히려 사회를 개방적인 방향으로 진보시킨다.

"덕이 온전해졌다"는 말은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힘이 완벽한 상태에 들어갔음을 뜻한다.

태연자약한 사람은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자신만의 흐름이나 결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기성자가 닭을 이십일 동안이나 훈련시키고도 왕에게 아직 안되었다고 말한 것은 닭이 자신의 힘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기보다는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이겨야 진짜 강자

나무 닭은 자기가 자기로만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자기 게임을 하는 사람만이 기존에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비판과 비난은 풍성해도 성숙한 자발성과 책임성은 매우 빈약하다. 이처럼 자아가 분열된 상태에서는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기 어렵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참된 지식도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덕이다.

지성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힘이다. 지성은 이 '발버둥'으로 완성된다.

교양, 인문, 철학, 문학, 선진 그리고 선도적인 시선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난이도가 높다.

지금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고, 창조나 문화가 강조되는 것도 모두 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 수준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다.

직업이라는 말은 자신이 찾은 그 역할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감을 의미한다.

질문에는 반드시'자기 관찰'과 ''자기 의조'가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니 질문을 할 때도 이 세계를 객관화시켜서 제삼자 입장에서 말하기보다는 나의 입장을 부각해서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혹은 '나의 관점은 어떠하다'라는 의지를 선행시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다.

우리가 왜 공부를 하고, 왜 철학을 하는지 처음으로 자각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알게 된 것을 나는 서른두세 살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런데 그때 나는 그것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제라도 알게 된 것에 매우 기뻐했다. 학문 간의 위계질서가 어떤지를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공부가 매우 즐거운 일이 되었다.

처음으로 공부가 재밌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대한 어떤 단계는 아니지만, 그 이전과 조금이나마 달라져간다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는 매우 큰 사건이었고, 일종의 축복이었다.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났을까? 어떻게 이런 축복이 나에게 찾아왔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진실한 순간을 피하지 않고 대면한 사람에게 우주 대자연이 주는 선물이라고..., 자신에게 정말 진실하면 우주 대 자연이 주는 선물이 있다고 말이다.

그보다는 진실한 나의 마음 상태 혹은 심리 상태가 오히려 더 그것을 정확히 보고 새롭게 보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유일하게 한 번 진실해봤던 그때 그 사건으로 세상을 보는 눈,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행위 다음의 절차를 궁금해하기보다는 직접 무엇인가를 하는 편이 낫다. 실행하지 않고 궁리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저 멀리 뒤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문_ 자신이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_자기 자신을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기준이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큰 인간은 외부의 것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과 경쟁할 뿐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부족한지 더 나은지를 따지지 말라. 경쟁에 빠지지 말라. 오직 자신과만 경쟁하라.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지만 자세히 살펴라.

자신이 사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혜로 사용하려면 우선 자신이 우뚝 서 있어야 한다.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성숙되어 있지 않으면 그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개인의 성숙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리고 성숙된 개인은 그냥 '개인'이 아니다. 성숙의 높이와 깊이는 이미 그 개인을 넘어서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인격적으로 상당한 성숙에 이른 사람은 혼자가 아니고, 반드시 동조하는 사람이 생긴다.

지식과 경험의 무게보다 나의 무게를 더 키우는 것, 더 커진 자신의 내면을 가지고 지식과 경험을 밟고 서서 지배하는 것, 이것이 결국은 주체의 독립이자 성숙이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치밀하고도 자세하게 벌이는 지적인 논증보다도 궁금증이나 호기심이랄지, 앞뒤 세세하게 재지 않는 배짱 같은 것들이 훨씬 더 큰 역할을 한다.

선을 쌓고 덕을 이루면, 신명이 저절로 얻어져서 성인의 마음이 거기에 갖춰진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마치 행운이나 선물처럼 비와 바람이 거기에서 생겨난다. 큰 산에서는 큰 바람이 생기고, 작은 산에서는 작은 바람이 생긴다. 우리는 바람과 비를 만들지 못한다.

이렇듯 탁월함을 추구하고 덕을 이루면 마치 행운이나 선물처럼 신명한 통찰력이 생기고 성인의 마음이 덩달아 갖춰진다.

학문을 하고 인격수양을 열심히 하면 통찰력이나 성심을 갖게 되지만, 학문을 하는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통찰력이나 성심을 가지려는 욕심만 앞세우면 통찰력이나 성심을 가질 수 없다.

자유나 행복이나 선진 같은 것도 그렇다. 이런 것들은 다 선물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 차라리 행복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좋은 습관이나 근면성을 기르라.

정말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흙을 쌓고 산을 이루고 있는지, 정말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물을 모아 연못을 이루고 있는지, 정말 진실하고 성실하게 탁월함을 추구하고 덕을 이루고 있는지, 그것만을 예민하게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적토성산'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성숙되고 독립된 주체가 발산하는 것이 창의성이고 상상력이다. 그런데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이다.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그것들이 튀어나올 정도로 내면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다.

내면을 두텁게 준비하는 과정이 '적토성산'이다.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적토성산'이후에 얻어지는 행운이나 선물이다.

카리스마가 없다는 것은 내면의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거기에 몰두하는 일이 '적토성산'이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행운이나 선물이 '카리스마'다. 내공이 갖춰진 내면은 향기처럼 발산된다. 우리는 우선 각자의 향기를 준비하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독립적이지 못하고 종속적 사고에 갇힌 사람들은 주로 상황이나 조건을 탓하면서 자기의 책임성이나 자발성을 발휘하는 도전을 유보해버린다. 남 탓으로 돌리는 일도 비슷한 맥락이다.

분명한 것은 종교는 기본적으로 믿을 바탕으로 하고, 철학은 회의와 반성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경전과 고전이 왜 설득력이 있느냐 하면, 인간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사람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높은 차원에서 개괄하는 능력을 갖기가 어렵다. 비유하자면, 2층 높이 정도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과 200층 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의 차이다.

이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고도의 지적 체계는 함부로 나오지 않는다.

고도로 지적인 높이에서 세계의 흐름을 포착하는 능력으로 형성된 사유 체계가 철학이다.

그리고 그 지성적인 높이는 그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의식과 연결된다.

생각의 결과를 배우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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